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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중현, 박인수의 `봄비

센치허스키 2011. 9. 23. 16:35

 

 

 

 

 

 

 

 

    신중현, 박인수의 '봄비   '

 

 

오늘 올리는 노래는 신중현 사단중에서 우리나라 소울(soul)의 아버지라 일컫는 박인수의 봄비입니다.
신중현 헌정앨범에 수록된 곡, 아날로그적인 정서가 가득 담긴 박인수, 신중현의 봄비..

 

봄비 박인수, 신중현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면
이슬에 젖어서 길을 걸으면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면
나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눈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나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눈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내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나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래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눈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그만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이슬에 나리는 길을 걸으면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면
나혼자 쓸쓸히 마음을 달래도
마음을 달래며


비 봄비
비가 나리네
봄비가 나리네
봄비
봄비가 나리네


봄비
봄비가 나리네


 

 

 

 

 

 

한국 락의 살아 있는 전설, 신중현

그의 이야기는 어린시절부터 시작해야 한다.

1938년 1월 4일에 태어난 신중현은 초등학교까지는 유복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이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불행은 시작되었고 피난 생활 도중 아버지 건강이 나빠지면서

가세는 기울었다. 급기야 부모님과 여동생이 죽으면서 신중현은 고아가 되었다.

남동생을 시골 친척집에 맡기고 서울에 올라온 신중현은 친척이 운영하는 '상수제약'이라는 공장에서

쉴 새 없이 일하면서 어린 나이에 벌써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런 힘든 생활 중에 유일한 취미이자 탈출구는 기타였고, 그의 노래에 가득 담겨 있는 고독과 외로움은

아마 불행했던 어린 시절이 항상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1957년에 미8군 오디션을 본 신중현은 당장 내일부터 나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문제는 기쁜 나머지 덜컥 전자 기타와 앰프가 있다고 거짓맛을 해버린 것이다.

돈이 없어 기타와 앰프를 사지 못하고,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던 신중현은 우연히 옛 상수제약에서

같이 근무했던 친구를 만나고, 사정을 들은 그 친구가 흔쾌히 기타와 앰프를 사주면서

신중현의 본격적인 음악 인생이 시작되게 되었다.

미 8군에서 신중현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다. 작고 마른 체구에서 뿜어나오는 폭발적인 연주가

미국 사람들에게는 신기했든지 신중현은 점점 유명연주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당시 신중현의 별명은 '히키 신' 이었는데 [히키 신 - 기타 멜로디 경음악 선집곡] 이라는 연주 앨범을 든

만들기도 했다.

'1960년경, 그의 첫 기타 독주무대가 용산역 앞 미군 정보부 소속의 시빌리안 클럽에서 열렸다.

클럽 책임자가 신중현에게 Virtues의 Moogie Shuffle 이 담긴 음반을 주며 그 곡을 독주무대에서 산

연주하라고 했다. 시빌이안 클럽은 당시 국내에 주둔한 미군 중에서도 고위층에 있는 군인들이 드나들던

곳이었는데, 정보부 군인은 평상시에도 사복을 입고 다니는 좀 고급스럽고 특수한 군인이었다.

그런 군인들이 부부동반으로 그의 독주 무대를 구경했다.

하여간 그는 최선을 다해서 연주했다. 연주가 끝났으나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앞을 좀 똑똑히 보라"고 했고,

그가 정신을 차려 앞을 자세히 보니 모두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그의 음악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라고 한다.'

-[신중현과 아름다운 강산] 중에서, 노재명 지음 -

 

박인수

1967년 어느날 낮 연습을 하던중, 훤칠한 키의 박인수가 자기를 한번 테스트 해달려며 찾아왔다.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니 "소울(Soul) 음악을 부르는 사람" 이라는 답이 금방 돌아오는데,
자신감이 느껴졌다.
테스트를 해보았다. 템프테이션스의 "My girl"과 오티스레딩의 "Duck of the Bay"같은곡은 한번 불렀다하면

그야말로 흑인이 울고 갈 정도였다.
거기에다 플레터스, 샘쿡, 레이찰스등 흑인가수의 노래라면 못하는게 없었다.

바로 그날 저녁 무대에 세웠다.
그런데 그 클럽은 원래가 백인클럽이어서 흑인들은 문에 기대어 음악을 훔쳐들을수 밖에 없는 곳이었는데도

흑인들이 새까맣게 몰려 들었다. 박인수의 모션 하나 하나에 박수를 치고 난리들이었다..
나는 박인수를 연세대앞 내 사무실에서 '봄비'만 가지고 1주일을 연습시켰다.

후렴부분에서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며 뽑아 올리는 절창에 공연장은 항상 떠나갔다.
그게 국내 최초의 소울 무대였던것이다..


아마 어릴적 기지촌에서 자라 그곳 무대에서 봐 둔 것인듯 여겨졌다.
지금도 사람들에게는 "봄비" 하면 박인수 이다. 이렇게 신중현은 박인수를 회상합니다...

한국 전쟁때 고아가 돼 미국으로 입양된 후 귀국했으나 어디에도 정을 붙일곳이 없었던 그는 이후 두번의

결혼실패..(나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어떤일도 서슴치 않는 여자들을 실제로 보고서 많이 놀랐다)
그렇게 그는 망가지고 있었다...
지금 소식이 끊긴 상태이지만 박인수 그는 천성적으로 슬픈 영혼을 가진 가수였다...


<신중현의 자서전 "록의 代父 신중현"에서 발췌>

1962년 무렵, 신중현은 당시에는 생소한 그리고 영국,미국에서도

이제 막 태동하는 락 그룹을 대한민국 최초로 결성하게 된다. 이름은 Add 4 (당시 표기는 에드훠)

비틀즈, 롤링 스톤즈 같은 그룹들도 1963년과 64년에 1집을 발표했으니까

신중현의 에드훠는 세계적인 추세를 봐도 빠른 결성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직 락그룹은 낯설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최초의 락 그룹 에드훠는 음반 몇 장만 남긴채 1966년 무렵에 해체된다.

에두훠 이후 일반무대에서 락 음악에 대한 반응이 신통치 않자

다시 미 8군 무대로 복귀한 신중현은 그룹 '블루즈 테드(Blooz tet)를 결성했다.

그리고 이 무렵, 박인수라는 가수가 노래하고 싶다고 신중현을 찾아왔다.

흑인의 감성이 짙게 묻어나는 소울 분위기 노래를 잘 불렀던 박인수는 블루즈 테트의 리드 보컬이 되었다.

1967년에는 신중현의 큰 아들, 그리고 신중현의 뒤를 이어 한국 락을 이끌어 가고 있는 큰아들 신대철이

태어난 해이다. 어머니인 명정강씨 역시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했던 그룹 '블루리본'의 드러머라고 하니

세 아들 모두 음악적인 재능을 타고 날 수 밖에 없었겠다.


http://cafe.daum.net/csy95201155/GIjG/57?docid=1L8lA|GIjG|57|20110217235954&srchid=IIMMLrjN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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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칼에서-

 

 

 

 

 

 

 

 

출처 : kingdom by the sea
글쓴이 : 에밀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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